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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서양철학 #사상가] 만능인 몽테스키외 - 배경, 생애, 사상, 의의, 감상

by 정치! 2020.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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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사상가] 만능인 몽테스키외 - 배경, 생애, 사상, 의의, 감상



이 글의 순서

 

Ⅰ. 사회적 배경 
Ⅱ. 생애 
Ⅲ. 저술 내용을 통해 본 사상 

  1. 연구대상과 방법 

  2. 정부의 유형과 원리 
  3. 공화정 
  4. 정치는 왜 부패하는가? 
  5. 권력의 분립
Ⅳ. 의의 
Ⅴ. 감상 

 


Ⅰ. 사회적 배경
   


  프랑스의 18세기는 몽테스키외와 루소를 비롯해 볼테르, 달랑베르로 대표되는 백과전서파 등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꽃을 피운 시기이다. 

 



  한편, “짐이 곧 국가다.” 이는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말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18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이미 두 번의 혁명, 즉 17세기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치르고 나서 왕과 귀족 혹은 부르주아 등 사회 세력들 간의 권력을 둘러싼 타협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상황은 달랐다. 오히려 프랑스에는 왕권에 대한 합리적인 모색이 두드러졌다. 보댕(Jean Bodin, 1530~1596) 이래 군주의 주권을 법률적으로 합리화하고 강화하려는 경향이 프랑스에는 강하게 존재했다. 이런 왕권 강화 경향은 루이 13세 시기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를 거쳐 루이 14세에 이르면서 절대주의 왕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발로 귀족들은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함에 따라, 결국  태양왕 루이 14세의 탄생을 가져왔다.


Ⅱ. 생애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이었으나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위와 봉토를 물려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결혼한 이듬해에 백부가 사망하였고, 그의 유서에 따라 백부의 작위와 봉토를 계승하여 제2대 몽테스키외 남작이 되었다. 백부의 작위를 상속한 몽테스키외는 백부가 맡고 있었던 보르도의 지방법원의 원장직 역시 계승하게 되었다.

 



  몽테스키외가 보르도 지방법원의 원장에 취임하게 된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가 선포되었다. 그 후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스코틀랜드가 합병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세워졌다. 1715년에 오랫동안 재위하였던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루이 15세가 즉위하였다. 이후 프랑스 왕국의 앙시앵 레짐은 여러 부문에서 파열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이후 몽테스키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그의 저작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서술되고 있다.


  
  1721년에 《페르시아인의 편지》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의 정치와 사회를 비꼬았다. 이후 그는 법원 원장직을 경매로 처분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 후 법률 연구를 위하여 각국을 여행하였는데, 특히 영국 정치의 좋은 점에 감명을 받았다. 1734년에 선보인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은 몽테스키외의 이름이 유럽 전체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748년에 《법의 정신》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법학 연구에 처음으로 역사 법학적, 비교 법학적,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법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삼권분립설, 입헌 군주 제도론 등을 전개하는 한편, 전제주의를 극력 공격하면서 법은 각국의 여러 환경에 적합한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디드로, 달랑베르 등이 편찬한 《백과전서》에도 협력하는 등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만드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Ⅲ. 저술내용을 통해 본 사상


 
  1. 연구대상과 방법

  몽테스키외의 연구는 최선의 정치 형태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연구를 함에 있어 당시의 사회계약론 전통과 구별되는 방법을 취했다. 자연권과 사회계약론의 이론가들은 모두가 동일한 질문, 즉 사회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제기했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서도 같은 방식, 즉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는 연구의 대상을 “지구 상의 모든 국민의 법률과 다양한 풍습과 관례”라 명시하고 시작한다. 사회계약론자들이 논리적 구성을 통해 자신과 대상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하려 했다면, 그는 그들과 구별되는 구체적인 대상을 제시하고 있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을 제시했으며,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역사적 방법론을 택했다.


  
  그는 모든 사회에 관계되는 만민법과는 별도로 그 사회에 적합한 개별적인 실증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법은 그 사회와 그 정체에 적합한 것, 즉 그 정체의 성질 및 원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후, 국토, 생활양식, 종교, 부, 인구, 상업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법의 정신’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입법자는 정체의 원리에 반하지 않는 한 국민의 정신, 즉 법의 정신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본성에 따라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정부의 유형과 원리

 


  그는 정부를 세 가지 유형 즉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공화정은 인민 전체가 주권을 가지는 민주정과 주권이 일부 인민이게 있는 귀족정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군주정은 군주 한 사람이 통치를 하지만 합법적 절차를 통해 제정된 법을 따르는 정체이며, 전제정은 군주 한 사람이 자의적인 욕망과 이익에 따라 통치하는 정체다. 정체를 이렇게 분류하는 데 있어 몽테스키외가 중시한 것은 권력의 행사 방식, 즉 권력이 법률에 의한 것인지의 여부에 있었다.

 



  각각의 정부 유형은 본성과 원리에 근거에 작동한다. 본성이란 그 정부가 어떠한 존재여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며, 원리란 정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민주정은 덕을, 귀족정은 절제를, 군주정은 명예를, 전제정을 공포를 그 원리로 한다.


  3. 공화정

 


  공화정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몽테스키외는 다른 정체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공화국에서 덕성이란 공화 정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곧 ‘평등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또한 민주정체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행복과 동일한 이익을 가지려 하며 이때의 사랑은 소박하며 아울러 검소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는 로마를 예로 들면서 로마의 공화정에서는 토지의 분배가 균등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몽테스키외는 공화국의 원리로서 시민적 덕목을 강조하고, 그중 민주적 공화국의 원리로써 평등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4. 정치는 왜 부패하는가?

 


  정체는 그것의 본성과 원리로부터 분리될 때 타락, 부패한다는 것이 몽테스키외의 생각이다. 민주정체의 부패는 시민들이 평등의 정신을 상실했을 때, 이에 더하여 극단적인 평등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 명령하는 사람으로 선출된 사람과도 시민들이 평등하게 되고자 하는 때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인민은 스스로 위탁한 권력마저 인정할 수 없고 만사를 스스로 행하고자 하며 원로원을 대신해서 심리하고 집정관을 대신해 집행해 재판관 전부를 파면하려 한다. 몽테스키외는 이러한 현상을 ‘극단적인 평등의 정신’이라는 말로 정의하며, 이는 곧 전제정치로 이어지게 된다고 경고함으로써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예견했다.

 


  5. 권력의 분립

 


  몽테스키외는 우선 권력과 자유의 관계를 설정한다. 몽테스키외는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행하는 권리”라고 정의했다. 이에 덧붙여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권력의 남용이 없는 상황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몽테스키외가 내세운 것이 바로 ‘권력분립’이다. 그는 권력을 입법권, 만민법에 관한 사항의 집행권, 시민법에 관한 사항의 집행권으로 구분한다.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권력분립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최선의 정치체제로 거론되어온 혼합정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집행권으로서 군주의 권력, 입법권 내에서는 귀족의 권력과 인민의 권력이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그는 로마 공화국의 흥망성쇠를 혼합 정체의 변화로 설명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원로권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빼앗자 원로원이 인민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고, 이는 로마 정체의 파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Ⅳ. 의의



  몽테스키외는 정치의 부패문제와 해결방안을 제도가 아닌 통치자와 인민 그리고 법의 정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근본으로 돌아가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구하고자 노력한 학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을 근대의 공화국이 나아갈 방향으로 지목하여 그의 사상을 사회경제적으로 적용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는 법의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지리, 날씨, 경제력, 국민성과 같은 요소들을 꼽았다. 이처럼 그는 당대의 여러 사상을 종합하여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Ⅴ. 감상

 


  몽테스키외는 귀족적 자유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권력의 균형을 위해 중간권력으로서의 귀족들의 역할을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몽테스키외를 접했을 때는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기득권으로써 본인의 이권을 챙기려 한 인물로 생각했으나 그의 사상을 공부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몽테스키외를 공부하며 이분법적 시각에 사로잡혀있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귀족세력은 비열하며 민중을 착취하는 세력이라는 편견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테스키외는 귀족의 가능성을 본 사상가가 아니었나 싶다. 왕과 민중의 사이에서 그들을 중재하며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이는 군대와 같은 사회조직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병장과 이등병 사이의 일병과 상병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며, 부대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 역시 일병과 상병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사상들을 집대성한 그의 모습 역시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앞서 살펴본 홉스가 물리학을 정치사회학에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지만, 몽테스키외는 기상학, 지리학,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들을 하나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만능인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 역시 몽테스키외와 같이 다양학 학문과 사상을 융합하여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거두는 학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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