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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연설 속 문장들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 3개국어로 공부하자

by 정치!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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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이 고단할 때마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연설 영상을 다시 보곤 한다. 세상살이의 짓궂음 속에 흔들리는 내게 스티브 잡스는 "괜찮아. 아직은 알 수 없어. 언젠간 이 경험이 빛을 발할 거야. 너의 목소리를 따라."라고 말을 건넨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을 나름대로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하나.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먼 미래에 돌이켜봤을 때 이어져 있을 것이다.
둘. 사랑하는 일을 끝까지 찾아 행하라.
셋. 당장 내일 죽을 수 있음을 떠올리며 살아가라.

 

약과학과(Pharmaceutical Science)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하고, 국제보건 NGO 단체에서 인증원으로 그리고 물류회사로 이직을 하는 등 나의 경력 경로는 이상한 점을 찍어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때그때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한 결과이기에 절대 후회는 없다.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조언처럼 지금 보기에는 이어지지 않는 점들이나, 먼 미래에는 각각의 경험들이 한 선을 이루고 지금 이상의 의미를 찾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경로는 잡스의 두 번째 조언, 사랑하는 일 찾기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의 실천이기도 했다. 부딪혀봐야 알 수 있었기에 하고 싶은 직무들에 번번이 도전했다. 잡스의 마지막 조언처럼 최종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당장 내일 죽는다면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수없이 되물었다.

 

갑자기 내 인생에 스며들어, 우연히 나의 인생 멘토가 되어준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을 이번 카테고리에 꼭 첫 게시글로 기록하고 싶었다.


Steve Jobs' Stanford Commencement Speech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Steve Jobs. Discurso en la Universidad de Stanford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곳의 졸업식에서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번에 처음으로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제 인생에 대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별 게 아니고 단지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Tengo el honor de estar hoy aquí presente en la ceremonia de graduación de una de las más prestigiosas universidades en el mundo. A decir verdad, esto es lo más cerca que estuve jamás de una graduación universitaria. Hoy deseo contarles tres relatos acerca de mi vida. Eso es todo. Nada del otro mundo. Simplemente tres relato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Reed 대학에 6개월을 다닌 후 중퇴했습니다. 하지만 도강을 하며 학교를 맴돌다 18개월이 지나서야 정말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뭐였냐고요?

 

El primer relato es acerca de unir los distintos puntos.

Abandoné los estudios en Reed College después de los primeros 6 meses, pero luego permanecí como oyente por otros 18 meses aproximadamente antes de dejarlos completamente. Así que, ¿por qué abandoné?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입니다. 저의 생물학적 엄마는 어린 대학생 미혼모였기에,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무조건 대학을 졸업한 부모에게 아기를 입양 보내길 원했고, 저는 태어나기도 전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난 후 그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계약을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지금의 부모님은 밤늦게 "예상치 못한 남자아이가 있는데, 양을 원하시나요?" 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물론입니다"라고 답했지만, 제 생물학적 엄마는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또 남편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입양을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몇 달 뒤 지금의 부모님으로부터 저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입양을 허락했습니다.

 

Todo comenzó antes de que yo naciera. Mi madre biológica era una joven soltera, graduada universitaria, que decidió colocarme en adopción. Creía enérgicamente que debía ser adoptado por universitarios graduados, de modo tal que todo se organizó para que fuese adoptado al nacer por un abogado y su esposa. Excepto que cuando emergí ellos decidieron a último momento que deseaban una niña. Así que mis padres, que estaban en una lista de espera, recibieron una llamada en el medio de la noche que decía: “Tenemos un varoncito inesperado, ¿lo quieren?” Dijeron: “Por supuesto.” Mi madre biológica averiguó más tarde que mi madre adoptiva nunca se había graduado de la universidad y que mi padre nunca había terminado el colegio secundario. Se rehusó a firmar los papeles definitivos de adopción. Solo se avino a hacerlo unos meses después, cuando mis padres le prometieron que algún día yo iría a la universidad.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에 저는 대학에 갔습니다. 하지만 어리숙하게 고른 대학은 스탠퍼드만큼 비싼 대학교였습니다. 서민층이었던 부모님의 저축금은 몽땅 제 등록금으로 쓰였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등록금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학이 내 인생에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학에 부모님께서 평생에 걸쳐 모아 온 돈을 모두 쓰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 잘 되겠지' 하며 중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무서웠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중퇴한 후에는 관심 없었던 필수 과목들의 수강을 멈추고, 관심 있는 과목들만 수강하기 시작했습니다.

 

Y 17 años más tarde fui a la universidad. Pero ingenuamente elegí una universidad que era casi tan cara como Stanford, y todos los ahorros de mis padres de clase trabajadora se estaban destinando a mis aranceles universitarios. Luego de seis meses, no le encontraba sentido a esto. No tenía idea de lo que quería hacer con mi vida y tampoco de qué manera la universidad me ayudaría a resolverlo. Y aquí me encontraba desperdiciando todo el dinero que mis padres habían ahorrado durante toda su vida. Así que decidí abandonar los estudios y confiar que todo se arreglaría eventualmente. Era una decisión bastante temerosa en ese momento, pero a la distancia fue una de las mejores decisiones que pude haber tomado. En el momento en que abandonara la universidad podía dejar de asistir a las clases que no me interesaban, y sí participar como oyente de aquellas que parecían interesantes.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생활이 로맨틱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가 없어서 친구의 방에서 잤습니다. 콜라 병들을 5센트로 교환해서 음식을 사 먹었습니다. 그리고 괜찮은 음식을 먹기 위해 일요일 밤마다 7 마일을 걸어 하레 크리슈나 사원에 가곤 했습니다. 그때가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호기심과 직관에 따라 우연히 했던 일 가운데 많은 것들이 나중에는 값진 경험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그 당시 Reed 대학은 미국 최고의 캘리그래피 수업을 제공했습니다. 학교의 모든 벽보, 모든 라벨은 아름다운 서체로 그려졌습니다. 중퇴를 하고 정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바탕체와 고딕체를 배웠고, 각기 다른 글자를 조합하며 여백의 폭을 다양화하는 방법 그리고 위대한 활판술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캘리그래피는 과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지녔고, 예술적인 절묘함으로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No todo fue romántico. No tenía un dormitorio, así que dormía en el piso en las habitaciones de amigos, devolvía las botellas de gaseosa para obtener los 5 centavos de depósito para comprar comida, y caminaba las 7 millas a través de la ciudad cada domingo por la noche para recibir una buena comida una vez por semana en el templo Hare Krishna. Me encantaba. Y mucho con lo que tropecé más adelante como consecuencia de hacerle caso a mi curiosidad e intuición resultó no tener precio después. Déjenme darles un ejemplo : Reed College en ese momento ofrecía quizás el mejor aprendizaje de caligrafía del país. En toda la ciudad universitaria cada cartel, cada etiqueta en cada cajón, era caligrafiado a mano de una manera bellísima. Dado que había abandonado los estudios y no tenía que asistir a las clases normales, decidí tomar un curso de caligrafía para aprender cómo se hace eso. Aprendí acerca de los tipos de letra con trazos de pie, cómo variar la cantidad de espacio entre diferentes combinaciones de letras, todo aquello que hace que la admirable tipografía sea grandiosa. Era hermoso, histórico, artísticamente sutil de un modo que la ciencia no puede captar, y yo lo consideraba fascinante.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10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 10 years later.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제 삶에 실질적으로 적용된다는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제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모든 기억이 돌아왔고, 제가 배운 서체를 모두 매킨토시에 적용했습니다. 매킨토시는 아름다운 서체를 구현한 첫 컴퓨터였습니다. 제가 만약 우연히 대학의 한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맥은 결고 다양한 활자체나 비례적으로 간격을 둔 폰트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윈도우가 바로 맥을 따라한 것을 보면, 어떤 PC도 아름다운 서체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지 않았을 테고, PC는 아마 멋진 타이포그래피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대학 시절에는 앞을 내다보며 점을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뒤돌아 봤을 때 아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Nada de esto albergaba siquiera la mínima esperanza de alguna aplicación práctica en mi vida. Pero diez años más tarde, cuando estábamos diseñando la primera computadora Macintosh, todo volvió a mi mente. Y lo volcamos todo en la Mac. Era la primera computadora con bellísima tipografía. De no haber asistido a ese único curso universitario, la Mac no hubiera tenido nunca tipos de letras múltiples o fuentes espaciadas proporcionalmente. Y dado que Windows simplemente copió a Mac, es posible que ninguna computadora personal las hubiera tenido. De haber proseguido mis estudios universitarios, no hubiera asistido a ese curso de caligrafía, y las computadoras personales no tendrían la maravillosa tipografía que tienen. Por supuesto que era imposible haber unido los diferentes puntos mirando hacia el futuro cuando estaba en la universidad. Pero fue muy, muy claro al mirar para atrás diez años más tarde.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반복하자면, 여러분은 미래를 내다보며  점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뒤를 돌아볼 때만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미래에 연결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감, 운명, 삶 그 자체, 업보 혹은 무엇이든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접근 방식은 절대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Nuevamente, no se pueden unir los distintos puntos mirando para adelante; se pueden unir únicamente mirando hacia atrás. Así que deben confiar que de alguna manera los puntos se unirán en el futuro. Deben confiar en algo sus agallas, el destino, la vida, el karma, lo que sea. Este enfoque no me ha traicionado nunca, e hizo toda la diferencia en mi vida.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아주 운이 좋게도 제가 사랑하는 것을 아주 일찍 찾았습니다. Woz와 저는 20살 때 차고지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애플은 10년 만에 차고지에서 2백억 달러의 가치와,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야심작인 '매킨토시'를 출시하고 1년 후 저는 30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고되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냐고요? 글쎄요, 애플은 성장했고 우리는 함께 회사를 운영할 재능 있는 사람을 고용했고, 1년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회사의 비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엇갈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진이 그의 편에 섰고, 저는 30살에 쫓겨나게 됐습니다. 매우 공개적으로요. 성인이 된 이후 제가 전적으로 집중했던 일들이 사라졌고, 정말로 절망스러웠습니다. 

Mi segundo relato es acerca del amor y la pérdida.

Yo tuve suerte - descubrí lo que realmente quería hacer temprano en mi vida. Woz y yo comenzamos con Apple en el garaje de mis padres cuando tenía 20 años. Trabajamos duro, y en 10 años Apple creció de ser una empresa compuesta por nosotros dos en un garaje a una empresa de $2 mil millones con más de 4000 empleados. Habíamos lanzado nuestra creación más refinada – Macintosh – un año antes, y yo acababa de cumplir 30. Y después me despidieron. ¿Cómo se puede ser despedido de la empresa que uno inició? Pues, a medida que Apple crecía contratamos a alguien que yo pensaba que era sumamente talentoso para dirigir la empresa conmigo, y durante el primer año o más las cosas anduvieron bien. Pero luego nuestras visiones acerca del futuro comenzaron a diferir y eventualmente tuvimos una disputa. Al tenerla, nuestro Directorio lo apoyó a él. Así que a los 30 estuve afuera. Y bien afuera. Aquello en lo que me había concentrado durante toda mi vida adulta había desaparecido, y fue devastador.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개월 간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대대로 전해져 오던 바통을 제 차례에서 떨어뜨린 듯, 이전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킨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David Packard와 Bob Noyce를 만나, 모든 일을 망친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저는 공공의 실패작이었고, 심지어 실리콘밸리에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아주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그 일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의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저를 바꿔 놓지 못했습니다. 거절당했음에도,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Realmente no supe qué hacer durante unos pocos meses. Sentía que había decepcionado a la anterior generación de emprendedores – que había soltado la batuta mientras que me la estaban pasando. Me reuní con David Packard y Bob Noyce y traté de disculparme por haber echado a perder las cosas de tal manera. Yo representaba un fracaso público muy importante, y hasta pensé en retirarme del valle. Pero poco a poco empecé a darme cuenta que todavía amaba lo que estaba haciendo. El curso de los acontecimientos en Apple no había cambiado eso para nada. Había sido rechazado, pero aún amaba lo mío. Así que decidí empezar de nuevo.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공의 무게는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 즉 상황에 대해 덜 확신하는 태도로 대체되었습니다. 덕분에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진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No me di cuenta entonces, pero resultó que el hecho de haber sido despedido de Apple fue lo mejor que me pudo haber pasado. El peso del éxito fue reemplazado por la facilidad de convertirme en un principiante una vez más, con menor certidumbre acerca de todo. Me dio rienda suelta para ingresar en uno de los períodos más creativos de mi vida.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NeXT, 그리고 Pixar 두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와이프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큰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되어, 애플이 NeXT를 인수함으로써, 저는 애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NeXT에서 개발했던 기술은 현재 부흥기를 맞은 애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Durante los próximos cinco años, inicié una empresa llamada NeXT, otra empresa llamada Pixar y, me enamoré de una maravillosa mujer que se convertiría en mi esposa. Pixar llegó a crear el primer largometraje animado por computadora en el mundo, Toy Story, y en la actualidad es el estudio de animación más exitoso a nivel mundial. En un giro destacado de acontecimientos, Apple adquirió NeXT, volví a Apple, y la tecnología que desarrollamos en NeXT está en lo más recóndito del renacimiento actual de Apple. Y tenemos, Laurene y yo, una maravillosa familia juntos.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끔찍한 맛의 약이었지만, 환자에겐 꼭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가끔 인생은 여러분의 뒤통수를 내려칩니다. 신념을 잃지 마세요. 제가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던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세요. 그것은 여러분의 연인에게 그러하듯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일이 점차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될 텐데, 이를 진심으로 즐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위대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관한 일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당신이 그것을 찾았을 때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관계와 같이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알게 될 때까지 정착하지 말고 계속 찾으세요. 

Estoy seguro de que nada de esto hubiera pasado de no haber sido despedido de Apple. Fue un trago amargo, pero creo que el paciente lo necesitaba. A veces la vida golpea en la cabeza con un ladrillo. No pierdan la fe. Estoy convencido de que lo único que me mantenía en curso era que amaba lo que hacía. Deben encontrar lo que realmente les apasiona. Y esto es tan cierto respecto del trabajo como lo es respecto del amor. El trabajo les llenará una parte importante de sus vidas, y la única manera de sentirse realmente satisfecho es realizar lo que consideran un gran trabajo. Y el único modo de realizar un gran trabajo es amar lo que uno hace. Si no lo han encontrado aún, sigan buscando. No se conformen. Así como sucede con todos los asuntos del corazón, sabrán cuando lo hayan encontrado. Y, así como sucede en cualquier gran relación, mejora más y más a medida que transcurren los años. Así que sigan buscando hasta que lo encuentren. No se conformen.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17살 때 다음과 같은 명언을 읽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듯 산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옳았음이 드러나리라." 그것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하겠는가?" 그리고 연속적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날이 많아질 때마다, 저는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Mi tercer relato es acerca de la muerte.

Cuando tenía 17, leí una cita que decía más o menos lo siguiente: “Si vives cada día como si fuera el último, algún día seguramente tendrás razón.” Me impresionó, y desde entonces, por los últimos 33 años, he mirado en el espejo cada mañana y me he preguntado: “¿Si hoy fuese el último día de mi vida, querría hacer lo que estoy por hacer hoy?” Y cada vez que la respuesta ha sido “No” durante demasiados días seguidos, sé que debo cambiar algo.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큰 선택을 맞닥뜨렸을 때 저를 도와준 중요 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들만 남겨지고, 거의 모든 것들 - 외부적인 기대, 자존심, 실패나 창피함에 대한 두려움 - 이 떨어져 나갑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를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의 덫을 피하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당신은 이미 벌거벗은 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El recordar que estaré muerto pronto es la herramienta más importante que he encontrado para ayudarme a tomar las grandes decisiones en la vida. Porque casi todo – todas las expectativas externas, todo el orgullo, todo temor a la vergüenza o al fracaso – todas estas cosas simplemente desaparecen al enfrentar la muerte, dejando sólo lo que es verdaderamente importante. Recordar que uno va a morir es la mejor manera que conozco para evitar la trampa de pensar que hay algo por perder. Ya se está indefenso. No hay razón alguna para no seguir los consejos del corazón.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 저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정밀검사를 받고, 췌장에 종양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아마 치료가 어려운 암일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살 수 있는 날이 세 달에서 여섯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제게 집에 가서 주변을 정리할 것을 조언했는데, 이는 죽을 준비를 하라는 의사들만의 언어였습니다. 그것은 제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할 이야기들을 단 몇 달안에 전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중에 가족들이 편할 수 있도록 신변 정리를 확실히 해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Me diagnosticaron un cáncer hace un año aproximadamente. Me practicaron una tomografía computada a las 7:30 de la mañana, y claramente mostraba un tumor en mi páncreas. Yo ni sabía lo que era el páncreas. Los médicos me dijeron que éste era seguramente un tipo de cáncer incurable, y que no llegaría a vivir más de tres a seis meses. Mi médico me aconsejó ir a casa y arreglar mis asuntos, que es el código médico para prepararse para morir. Quiere decir que hay que tratar de explicarles a los hijos todo aquello que pensaba que iba a tener diez años para contarles, en pocos meses. Significa asegurarse de tener todo puntualmente arreglado de modo que sea lo más fácil posible para la familia. Significa empezar a decir adió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하루 종일 각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이후, 조직 검사를 받았는데 목구멍에 내시경을 집어넣어, 위와 장을 지나 췌장에 바늘을 꽂아 종양에서 약간의 세포를 추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마취 상태였는데, 아내가 전해주기를 현미경으로 세포를 검사한 의사들이 기뻐 소리쳤다고 합니다. 수수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 괜찮습니다. 

Pasé el día entero con ese diagnóstico. Luego por la tarde me realizaron una biopsia, en la que introdujeron un endoscopio por la garganta, a través del estómago y hasta los intestinos, pusieron una aguja en mi páncreas y retiraron algunas pocas células del tumor. Estaba sedado, pero mi esposa, que estaba allí, me dijo que cuando vieron las células bajo el microscopio los médicos comenzaron a gritar porque resultó que era una forma muy rara de cáncer pancreático que se cura mediante cirugía. Me realizaron la cirugía y estoy bien ahora.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이것이 제가 죽음을 직면한 가장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십 년 동안 그렇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는 죽음이 순전히 지적 개념이었을 때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도 그곳에 가고자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종착역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을 바꾸는 대리인입니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길을 터줍니다. 이제, 새로운 것은 여러분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멀지 않은 때 당신은 점점 낡아져 퇴장하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이어서 죄송하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Fue lo más cerca que me encontré de la muerte, y espero que sea lo más cerca que me encuentre por varias décadas. Habiendo pasado esto, les puedo decir lo siguiente con un poco más de seguridad que cuando la muerte era un concepto útil pero puramente intelectual: Nadie quiere morir. Aún la gente que quiere ir al cielo no quiere morir para llegar allí. Y sin embargo la muerte es el destino que todos compartimos. Nadie ha logrado escapar. Y así es como debiera ser, porque la muerte es muy probablemente la única mejor invención de la vida. Es el agente de cambio de la Vida. Retira del camino lo viejo para dar paso a lo nuevo. En este momento lo nuevo son ustedes, pero algún día no demasiado lejano, gradualmente se convertirán en lo viejo y se los sacará del camino. Lamento ser tan dramático, pero es realmente cierto.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기 위해 이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생각의 결과를 살아가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세요.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타인의 의견으로 덮이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직관과 마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관가 마음은 어쩌면 이미 여러분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Su tiempo es limitado, así que no lo malgasten viviendo la vida de otro. No se dejen atrapar por el dogma – que implica vivir con los resultados de las creencias de otros. No permitan que el ruido de otras opiniones ahogue vuestra voz interior. Y lo que es más importante, tengan el coraje de seguir a sus corazones e intuición. De algún modo ellos ya saben lo que ustedes realmente quieren llegar a ser.Todo lo demás es secundario.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때,  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저희 세대의 바이블에 가까운 놀라운 간행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멀지 않은 Menlo Park의 Stewart Brand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는데, 특유의 시적 감성으로 쓰인 생기발랄한 책이었습니다. 때는 개인용 컴퓨터와 데스크톱 출판이 도입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던지라, 모든 것이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구글의 문고본과 같은 형태인데, 구글이 출현하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그 책은 이상적이었고 멋진 견해와 정갈한 툴로 가득했습니다. 

Cuando era joven, existía una publicación maravillosa llamada The Whole Earth Catalog, que era una de las biblias de mi generación. La había creado un sujeto llamado Steward Brand no demasiado lejos de aquí en Menlo Park, y le transmitió su toque poético. Esto sucedía en los últimos años de la década de 1960, con anterioridad a la publicación mediante computadoras personales y de escritorio, así que todo se llevaba a cabo con máquinas de escribir, tijeras, y cámaras polaroid. Era una clase de Google en edición rústica, 35 años antes de la aparición de Google: era idealista, y desbordante de herramientas prolijas e ideas importante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ewart와 그의 편집진들은 그 간행물을 몇 차례 발행했고, 책이 운을 다할 때쯤 마지막 호를 발행했습니다. 그게 1970년대였으니, 제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입니다. 마지막 호 뒤표지에는 시골길의 이른 아침 풍경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험적이라면 아마 그 사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 밑에는 다음의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그것은 그들이 전한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바보처럼 도전하십시오. 저 역시 항상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길 바라 왔습니다.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Stewart y su equipo publicaron varias ediciones de The Whole Earth Catalog, y luego cuando había cumplido su ciclo, publicaron una edición final. Esto sucedía a mediados de la década de 1970, y yo tenía la edad de ustedes. En la tapa de la edición final había una fotografía de un camino rural a primeras horas de la mañana, del tipo de ruta que ustedes caminarían si fueran tan aventureros. Debajo de la foto aparecían las siguientes palabras: “Si no se tiene avidez por el conocimiento, no se conocerá el éxito”. Era su mensaje de despedida al anunciar el fin de la publicación. Stay Hungry (sigue hambriento). Stay Foolish (sigue inquieto). Y siempre he deseado eso para mí. Y ahora, que ustedes se gradúan para empezar de cero, deseo eso para ustedes
 

 

"Stay Hungry. Stay Foolish."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바보처럼 도전하십시오."

 

"Sigue hambriento. Sigue inquieto."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Muchas gracias a todos.


연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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