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인식론

[인식론 강의 #10] 이마누엘 칸트 인식론(2) (feat. 범주, 모사설, 구성설, 진리의 섬나라, 물자체)

by 정치! 2020. 11. 29.
반응형

[인식론 강의 #10] 이마누엘 칸트 인식론(2) (feat. 범주, 모사설, 구성설, 진리의 섬나라, 물자체)



이 글의 순서

 

개관

오성의 기능

  • 오성의 질료와 형식

  • 범주

  • 실체와 감성의 범주

  • 인과의 범주

  • 모사설

  • 구성설

  •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진리의 섬나라

  • 버클리 관념론과의 비교

  • 진리의 섬나라

  • 물자체

  • 이성의 사유

  • 모순과 이율 배반

  • 순수이성의 이율 배반

 


개관

 

  칸트의 비판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단점을 가려내어 양쪽의 장점만을 골라서 종합하는 입장이요따라서 내용도 갖추고 보편타당성도 띤 실질적 진리관을 세운다(3.1). 이러한 인식은 칸트에서 감성과 오성의 종합에서 이루어진다그러나 감성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일 때 여기에 벌써 질료와 형식의 종합이 이루어지고 있다(3.2).

 


 

  오성의 자발적 사유는 감성의 직관적 지식에 관해서 이루어지되 그것은 오성 형식인 범주에 따른다우리는 이러한 칸트의 구성설에서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이루어지는가를 살핀다(3.3)

 


 

이런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사상에서 물 자체는 이론적으로 미해결의 난문으로 남는다그러나 인식진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종합으로서의 진리의 섬나라 속에만 있으며 따라서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한갓된 사유는 진리일 수 없음을 우리는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3.4).

 


오성의 기능

 

 

오성의 질료와 형식

 

직관 즉 지각은 시공적 지식이므로 때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타당적인 지식은 못된다그러면 이 보편타당성을 주는 기능은 무엇인가그것이 칸트의 이른바 오성이다

 


 

칸트에서 인식(실질적 진리)은 감성과 오성의 종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오성이란 자발적·능동적인 사유 기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유될 재료가 제공되어야 한다그것은 감성 작용의 결과인 직관이다이 질료가 오성 형식과 결합하여 인식을 성립시킨다

 


 

오성 형식도 감성 형식과 마찬가지로 질서 부여 작용이다. 오성 형식 역시 인간 오성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기능으로서 선천적이며 또 그러면서 질료를 가공해서 인식을 구성하는 기능이므로 선험적이다.

 

  • 감성 작용의 결과 = 직관
  • 직관 + 오성 = 인식
  •  인식 = 감성 + 오성

범주

 

오성 형식을 칸트는 범주라고 부른다원래 오성이란 사유 작용이다. 사유란 개념에 의한 판단의 연결이다칸트는 판단의 종류만큼의 범주를 든다오성의 사유 작용은 이 범주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체와 감성의 범주

 

오성의 결합통일작용결합 통일 작용이 유동하는 감각들에 작용해서 객관적인 물체성을 성립시키는 것이다이렇게 감각들을 고정된 것으로 결합·통일하는 오성의 기능이 바로 범주지금의 경우 그것은 실체와 감성이라는 범주이다.

 


인과의 범주

 

흄은 인과적 지식은 실인즉 필연성을 띤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형성된 습관에서 나온 신념을 토대로 한 개연적 지식에 불과하다고 하여 회의론에 빠졌다그러나 자연과학의 진리성을 믿어 마지않는 칸트는 여기에 동조할 수는 없다범주로 결합·통일된 인과적 지식은 이런 주관과 시공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적인 지식이다. 오성이 사유 작용을 한다는 것은 감성이 제공하는 직관(질료)을 범주(형식)에 따라서 종합·통일한다는 뜻이다.

 


모사설

 

상식이나 과학은 인식론적 비판이 없는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리하여 자연현상이 인과적으로 변화한다는 지식은 객관의 세계에서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우리 주관이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라 한다이것이 모사설이다.

 


구성설

 

인간 오성에서 성립하는 인식은 오성 형식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그러므로 대상이 미리부터 밖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을 우리는 우리의 선험적 형식에 따라서 우리 나름으로 구성해 가지는 것이다

 


 

대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주관이 그대로 모사하고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잡다한 질료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주관 형식에 따라서 대상을 구성해 내는 것이다이것이 모사설에 대립되는 구성설이다

 


인간은 자연의 입법자

 

그러므로 인식이란 어떤 대상의 인식임에 틀림없지만 이 대상이란 미리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관의 인식 작용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즉 인식의 대상은 대상의 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즉 인과적 자연이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 주관의 해석이요인간의 지식세계로서의 자연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종전에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 중심이던 것을 정반대로 주관 중심으로 바꿔 놓은 셈이다칸트는 이것을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르고 있다

 


진리의 섬나라

 

버클리의 관념론과의 비교

 

실재론에 대립되는 견해를 일반적으로 관념론이라고 한다우리는 앞서 버클리의 관념론을 본 바 있다있는 것은 오로지 관념들과 이것을 가지고 있는 자아 또는 정신뿐이라는 것이다. 이때 관념이란 지각을 말한다즉 그것은 우리가 외적 사물을 감각함으로써 얻는 지식이다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외적 사물이 저 지각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란 다만 관념들의 다발지각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적 지식뿐이다이런 견해를 우리는 현상론이라고 부른다칸트도 대상이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대상이 미리부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인간 주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현상계는 개인적 주관적인 관념의 세계인 데 대해서 칸트의 그것은 객관성도 띠고 필연적 보편타당성도 지니고 있는 이른바 진리의 세계이다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이 믿고 있는 자연계이다.

 


진리의 섬나라

 

이 진리의 세계는 더 나아가 진리의 섬나라라고도 일컫는다즉 진리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감성은 유한한 인간의 감성으로써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질료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수용능력이다즉 인간 감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주어져야 한다

 


 

주어진다는 것은 주는 자를 예상하는 말이다우리 인간의 감성 자체가 주는 자는 아니기에 주는 자는 우리 아닌 저 밖의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진리의 세계는 섬나라와도 같은 것이다.

 


물자체

 

이 진리의 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넓고 넓은 바다이것을 칸트는 물 자체라고 한다이것은 현상에 대립되는 개념이다물 자체는 이 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더 정확히는 질료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이 원인 자체는 감성에 들어오지 않고 따라서 오성 작용이 미치지 못한다그러므로 그것은 인식될 수 없다인식될 수 없으므로 물 자체는 있다고 할 수 없다그러나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없으면 질료가 주어질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현상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칸트의 관념론이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과 다른 또 하나의 점을 발견한다버클리 인식론에서 있는 것은 오직 관념뿐이지만 칸트 인식론에서는 지식의 세계현상계의 밖에 이것을 있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물 자체를 비록 인식론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험적 관념론

 

감성과 오성은 주관의 두 기능이다그리고 감성형식감성 형식과 오성형식오성 형식은 이 주관의 두 종류의 형식이다감성 형식인 시공그리고 오성 형식인 범주도 모두 선천적 형식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선천적 형식을 구비하고 있는 주관을 초개인적인 주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런 선천적 형식을 가지고 지식을 구성하는 주관이므로 선험적 주관이라고 부른다칸트의 관념론은 이런 선험적 주관의 선험적 작용에 의한 지식만을 인정하므로 선험적 관념론이다.

 


이성의 사유

 

감성에 주어지지 않는 초감성적인 것에 관해서 사유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다칸트는 이것을 이성理性(좁은 의미)이라고 부른다물 자체는 인식되지는 못하지만 이성에 의해서 사고될 수는 있다이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 우리는 현상계(진리의 섬나라밖에 그 원인 또는 근저로서의 물 자체가 있다고 아는 것이다

 


 

이성은 참된 사유는 되어도 참된 인식은 못된다. 즉 내용은 있는 실질적 진리는 못된다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만으로 진리는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합리론자들이다그들은 이성의 진리성을 믿는 나머지 사고와 존재의 일치까지도 주장한다그리하여 칸트로부터 독단적 형이상학자들이라고 낙인찍힌 것이다

 


 

칸트는 이 이성의 세계를 가상의 세계라고 규정해 버린다진리의 세계에 대립된 세계라는 것이다그것을 우리는 칸트의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에 의해서 예시해 보기로 하자.

 


모순과 이율배반

 

감각적 경험 즉 감성의 제약에서 벗어난 이성은 이른바 창공을 나르는 비둘기와 같이 초감성적인 세계를 한없이 날아간다이성은 그리하여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 사고의 날개를 펼친다이 세계 전체에 대한 사고에서 이성은 이율배반에 빠진다는 것이다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 대립하는 두 명제가 동시에 같은 권리를 가지고 주장됨을 말한다. 그런데 이율배반이란 이렇게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주장된다는 것즉 둘 다 참 또는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논리적으로 그야말로 모순된 일이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칸트는 이런 이율배반이 세계 전체에 관한 이성의 사유에서 성립함을 보여 준다그것은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이다.

 

1. 세계는 시간 공간적으로 시초(한계)가 있다 - 없다.

2. 세계에서의 모든 것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아니다.

3. 세계에는 자유가 있다 - 없다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4. 세계의 모든 것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절대적 존재 즉 신이 있다 - 없다.

 

칸트는 여기에 열거된 네 쌍의 서로 모순되는 명제를 하나하나 증명해 간다그러면 이율배반은 왜 일어나는가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성(좁은 의미)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된다이성은 경험의 세계를 떠나서 초감성적인 것에 관해서 사고하는 기능이다이렇게 감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저런 모순에 봉착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