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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책 속의 문장들

[#인문학 #책추천 #도서리뷰]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by 정치!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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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책추천 #도서리뷰]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이 글의 순서

 

* 들어가며

* 이 책의 저자는

* 이 책은

* 책 속의 문장들

* 나가며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정치! 입니다.

요즘 제 블로그 피드에는 마이클 샌델의 책과 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채워지고 있어요.

 

 

샌델 교수는 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과연 그럴까?"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나갑니다. 그의 주장과 근거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등 모험과 도전을 즐겨하는 것이 취향인 제게는 샌델 교수의 저작들이 참 재밌게 느껴져요.

 

 

30년 이상을 살아오며 당연하게 느꼈던 능력주의의 환상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기에 또 한 번 겸손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의견이 실은 똥 같은 의견일 수 있겠구나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능력주의는 당연히 옳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능력주의에 대하여 달리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죠.

 


이 책의 저자는 : 책날개에서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2010년 이후 한국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수업은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샌델이 진행 중인 영국 BBC의 정치철학 토론 프로그램 〈위대한 철학자들〉 시리즈는 '철학적 아이디어의 이면을 탐구한다'는 주제로, 세계 각국의 토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27개국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데, 중국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이 책은 : 알라딘 제공 책 소개

 

‘공정’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두고 각계각층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쓴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란 원제로 미국 현지에서 2020년 9월에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왔던,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주의가 제대로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본다.

 


책 속의 문장들

 

CHAPTER 1 승자와 패자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탄 사람들은 코스모폴리탄식 정체성을 진보적이고 뛰어나다고 치켜세우면서 보호주의, 종족주의, 갈등 등이 갖는 협소하고 파편적인 정체성과 비교했다. 그들은 이제 '좌냐 우냐'의 기준이 아니라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기준으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웃소싱, 자유무역 협정, 무제한적 자본 유동성 등에 관한 비판은 '꽉 막힌 생각'일 따름이며, 세계화 시대의 종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기술관료적 통치방식은 여러 공적 문제를 기술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써 보통 시민들은 손을 써볼 수조차 없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적 토론의 범위를 좁히며, 공적 담론의 내용을 공허하게 하고, 개인들이 점점 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45-46P)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53P)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67P)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반면 자수성가의 윤리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79P)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이렇게 선언했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가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이 위대한 까닭, 그것은 미국이 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런 식의 표현을 자주 썼다. 유권자들에게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하겠다"는 약속은 그의 난폭함이며 졸부 기질 하고 맞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이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이든 나라든 정의로움은 정의로움이고, 부와 권력은 부와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강대국이 꼭 정의롭지는 않으며,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나라들이 꼭 강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8P)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와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소득과 재산,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준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는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05-106P)

 



미국인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국민들보다 인간의 자수성가 능력을 더 많이 믿는다. 과반수의 미국인(57퍼센트)이 "인생 성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에 반대한다. 반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포함한 타 국가 국민들 과반수는 성공이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변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일과 자기 구제에 대한 이런 입장은 연대와 시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127-128P)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글로벌 경쟁에 대한 이런 불편한 소식을 전한 오바마는 청중들에게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사회적 상승 담론의 보다 활기찬 변형판을 내놓으며 연설을 마쳤다. "저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뭘 좋아하든 상관없이, 이 나라가 언제나 '하면 된다'는 신념이 이뤄지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147P)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 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164-165P)

 


CHAPTER 5 성공의 윤리

 

이처럼 문제를 더 깊이 살펴보려면 도덕, 그리고 정치 프로젝트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을 검토해야 한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반론은 설령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리하여 각자의 직업과 보수가 노력과 재능에 완전히 비례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반론은 만약 능력주의가 공정하다 해도 과연 그것이 좋은 사회일지 의문을 제기하는데,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과 불안을 자아낼 것이며 패자에게는 분노를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태도든 정신적 번영에는 해로우며 공동선 개념에는 치명적일 것이다. (196-197P)

 


 

우리는 성공이 (스포츠에서든 인생에서든)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믿고 싶으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천부적 재능과 유리한 배경의 문제는 능력주의 신념의 소유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노력만으로 칭찬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렇듯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의 도덕적 중요성을 한껏 강조한다. (203P)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247P)

 


 

'개인을 선별하되, 심판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는 코넌트의 믿음은 그가 수립하려 애쓴 능력주의 체제가 갖는 도덕 논리와 심리적 매력을 도외시하고 있다. 세습 귀족제에 맞선 대표적인 능력주의 옹호론 중 하나는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 성취했으니 그 능력에 따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선별은 성취와 자격에 대한 심판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재능 있고 성공한 사람은 명예와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공적 심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272P)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 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283P)

 


 

인재 선별기를 뜯어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287P)

 


CHAPTER 7 일의 존엄성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70년대까지, 대학 학위가 없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편안한 중산층의 삶을 사는 일이 가능했다. 이는 이제는 훨씬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40년 동안 대졸자와 고졸자의 수입 격차(경제학자들이 "대졸자 프리미엄"이라 부르는)는 두 배로 늘어났다. 1979년,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40퍼센트 정도 많은 수입을 올렸다. 2000년대에는 80퍼센트까지 높아졌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1979년에서 2016년까지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수는 1,950만에서 1,200만까지 줄었다. 생산성은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경영자와 주주의 몫은 점점 더 많아졌다. 19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어났다. (307P)

 


 

이러한 삶의 조건은 슬프게도 마이클 영의 예견을 뒷받침한다. "능력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회에서는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층계급이 이처럼 도덕적으로 취약해진 적은 없다." (313P)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지금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이는 그 분노가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잃은 것과 관련되어 있어서다. 구매력의 저하도 분명 문제지만,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상처는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과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주는 효과와 맞물린다.

 

이 상처를 인식하고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 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정치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한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이 분노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이다. (323P)

 


 

따라서 공동선의 시민적 개념은 일정한 유형의 정치를 요구하며, 그것은 공적 숙의의 영역과 사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일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달리할 것도 요구한다. 시민적 개념의 관점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이다. 생산자로서 우리는 우리 동료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만들면서,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기여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우리가 받는 급여액으로 판단할 수 없다. 급여액은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프랭크 나이트의 지적처럼 수요와 공급의 우연적 상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기여분의 참된 가치는 우리 노력이 향하는 목표의 도덕적, 시민적 중요성에 달려 있다. 이는 아무리 효율적일지언정 노동 시장이 제공할 수는 없는 독자적인 도덕 평가와 연관된다. (324P)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 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의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으모가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328-329P)

 


 

오늘날 경제에서 누가 만드는 자이고 누가 가져가는 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결국 기여적 정의론으로 귀착된다.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사고 과정은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 (342P)

 


결론  _ 능력, 그리고 공동선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348-349P)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353P)


나가며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바로 공동선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무한 경쟁사회의 특징을 보이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공동선'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능력주의 사회는 마치 시한폭탄을 서로 넘기는 사회와 같지 않을까 싶다. 시한폭탄을 남에게 넘겨주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듯이, 누군가에게 뒤지지 않고 이겨냄으로써 우리는 편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니 다 함께 무언가를 함께 도모하는 일은 설령 그것이 '공동선'이라 할지라도 참 쉽지 않다.

 

 

또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능력주의 사회는 승자와 패자에게 모두 시련과 고통은 안긴다는 점이었다. 승자는 승자 나름대로 능력주의로 인해 완벽주의에 빠지게 되고 자그만 실수나 실패에도 큰 좌절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 패자는 패자대로 남들에게 뒤졌다는 데서 비롯하는 자존감 하락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멸시를 이겨내야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세계화 그리고 GDP라는 숫자는 국가 간의 경쟁을 촉발시키고, 이는 국민들의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정책을 수립하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능력주의가 통치에 이상적인 이념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득을 보는 사회여야 스스로 능력을 쌓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경쟁력, 그리고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사이에 시민적 덕성과 공동체적 정신은 밑바닥을 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필수 인력으로 일컫는 이들을 지목한다. 택배 노동자, 환경 미화원, 화물차주 등 지금 상황에서 필수적인 직업을 삼고 있는 자들을 오히려 낮잡아 보는 지금의 세태는 무척 아이러니하다. 보통 필수적이라 하면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평가가 시급하다. 우리 사회에 있어 꼭 필요한 직업들이 제대로 존중받고 있는지부터 우리 사회에 중요한 것이 GDP, 경제성장률과 같은 것들인지 정치적 담론의 활성화, 사회 자본의 확대, 시민의 연대 등과 같은 것들인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내가 능력 있다고 쨀 것도, 내가 능력 없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하거나 노력 부족 또는 실수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다 운이 좋아서 혹은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됐을 확률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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